사무실에서 사용할 파티션이 필요해서 알아보기 위해 가구매장에 전화를 걸었다. "사무실에서 쓸 파티션이 있나요?" "네, 높이가 120cm, 150cm가 있습니다." "120cm는 좀 낮은 것 같고, 150cm로 6장 부탁드려요." 파티션이 도착했고, 설치를 했다. 그제서야 나는 내 키가 170cm밖에 되지 않는다는 것과, 키가 158cm밖에 되지 않는 아내와도 키 차이가 별로 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잊고 있었음을 깨달았다. 150cm에 달하는 파티션 때문에 사무실은 요새가 되어 버렸고, 울며 겨자먹기로 다시 설치해야 하는 번거로운 일이 생겼다. 세계적인 천재 법학자 칼 비테 주니어를 교육한 아버지 칼 비테Karl Witte는 아들이 지혜로운 사람으로 자라날 수 있도록 가르쳐주기 위하여 아무나 믿지 않도록 가르쳤다. 겉으로 보이기엔 순해보이고 천진난만해보이는 사람일지라도 속은 어둡고 교활할 수 있다는 사실을 가르침으로써 성숙한 어른으로 자라날 수 있도록 한 것이었다. 사는 동안 다양한 능력과 기술이 필요하지만, 지혜로운 마음을 갖추는 데 있어서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분별력이 아닐까 싶다. 매사에 정확한 분별력을 갖추는 것이야말로 시시때때로 찾아오는 어려움과 문제
초등학교 2학년 때 있었던 일이다. 당시 우리 가족은 방 2칸짜리 집에서 셋방살이를 했는데, 그 곳에서 2년 정도 살았던 기억이 난다. 방문을 열고 나오면 세숫대야와 호스가 있는 곳이 주방이었고, 화장실은 공동화장실이었다. 주인집은 나와 동창인 친구네 집이었다. 가끔 친구네 집에 놀러 가서 레고를 갖고 놀았는데 '왜 우리 집에는 레고가 없을까? 하고 생각하던 기억이 난다. 하루는 아버지가 나를 부르셨다. 그리고 솔직하게 이야기하라고 하셨다. "어떤거?" "니가 만 원 갖고 갔나?" "아니." "솔직하게 이야기해. 거짓말하지 말고." "안 갖고 갔는데." 아버지의 표정이 굳어지기 시작했고, 나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초등학교 5학년 무렵이었다. 어린 마음에 엄마의 지갑에 손을 댄 적이 있다. 오락실이 가고 싶은데 용돈만으로는 부족했다. 3천원인가 4천원을 몰래 꺼내서 오락실에 갔다. 며칠 뒤 엄마가 물었고, 나는 순순히 사실대로 이야기했다. 그리고 두 번 다시는 엄마의 지갑에 손을 대지 않았다. 5학년과 2학년은 불과 3살 밖에 차이가 나지 않지만 만원을 대하는 자세는 다르다. 1992년에 만원은 9살짜리 꼬마에게 상당히 큰 돈이었다. 경제관념이 없었기에
한 소년이 있다. 사람을 죽였다. 12명의 배심원이 유죄라고 판결하면 이 소년은 사형 선고를 받는다. 11명이 유죄라고 이야기하고 한 명만이 무죄일 수도 있다고 이야기하는데, 영화는 결국 12명 모두 무죄를 선고하게 되고 끝이 난다. 영화 '12인의 성난 사람들(12 Angry men)'의 대략적인 스토리다. 세상에 태어나서 읽어본 책들 중 가장 훌륭한 책을 꼽으라면 레미제라블이었다. 최근에는 호메로스의 일리아드 Iliad로 바뀌었지만, 그전까지만 해도 레미제라블처럼 잘 쓴 책이 있을까 싶을 정도로 완벽했다. 정말 멋진 소설이었다. 영화는 '12인의 성난 사람들(12 Angry men)'이었다. 포레스트 검프, 캐스트 어웨이, 타이타닉, 오아시스 등등 재미있게 감상한 영화는 많이 있었다. '12인의 성난 사람들'은 대부분의 작품들과 달라도 너무 달랐다. 흡사 상당한 역사적 가치를 담고 있는 예술 작품과도 같았기에, 오래전에 출시된 영화라고만 하기엔 너무 아까웠다. 극 중에서 '소년은 유죄일 수도 있으나, 무죄일 수도 있으므로 성급하게 유죄 판결을 내리긴 이르다.'라고 언급하며 토론을 이끌어간 주인공 데이비스(헨리 폰다)는 건축가 architect였다. 영화가
나는 생각하는 즐거움을 안다. 평소에는 지속적으로 생각하는 습관을 갖고 있다. 서재에 꼼짝없이 앉아서 10시간 넘게 독서하고 글만 쓴 적도 있다. 학창 시절 잘 나가는 '부진아'였던 것에 비하면 상당히 괄목상대할 만한 성장이 아닌가 싶다. 덕분에 일상이 단조롭기 그지없다. 회사에서의 시간을 제외하면 육아, 독서, 운동, 공부가 전부다. 술도 마시지 않고 담배도 태우지 않는다. 아내 몰래 숨겨둔 여자도 없고, 노름도 하지 않으며, 게임도 하지 않는다. 숨겨둔 여자가 없으니 숨겨둔 비상금도 없어서 돈도 별로 쓰지 않는다. 반면에 틈만 나면 소설을 쓰고, 오래된 고전을 묵상하며, 노트를 꺼내서 잡다한 메모를 한다. 나쁘지 않은 습관들을 체득했고, 그러는 사이에 굉장한 집중력과 끈기가 생겼다. 단조로운 일상은 나로 하여금 상당한 집중력과 끈기라는 능력을 선물해준 셈이다. 그처럼 평범한 일상, 단조로운 일상은 이렇다 할 문제점을 만들지 않는 데다 주위 사람들에게 크고 작은 신용을 얻을 수 있는 기회로 만들어졌다. 돈을 벌지 말고 신용을 벌어라. '신용을 가진 자'는 현대의 연금술사이다. -니시노 아키히로 신용을 얻는 것이 잘 짜인 단조로운 일상 덕분에 만들어진 셈이지
“사람은 공부해야 한다”며 나무 팔아서 대학입학금 주셨던 아버지" 평생 잊지 못할 아버님의 말씀인 “사람은 공부를 해야 하느니라”라는 명언을 잊지 않고 살고 있습니다. 제가 6세 때, 십 리나 되는 산골짜기 언덕 밑 초가집 서당으로 천자문을 배우라고 보내주신 덕분에 60년이 지난 지금도 한자(漢字)를 좋아하고 있습니다. 일제강점기에 태어나셔서 초등학교도 제대로 다니지 못하신 아버님께서, 6·25전쟁 때는 신의주까지 총 들고 싸우러 가셨다고 하니 인생 자체가 전투였다는 생각이 듭니다. 면사무소에서 버린, 다 찢어진 신문을 얻어다가 등잔불 밑에 펼쳐 놓고 읽으시던 모습이 아직도 눈에 선합니다. “꼴을 베어 오너라. 콩밭에 거름을 주거라. 모판을 나르거라” 하시며 일을 시킬 때마다 불만 가득한 눈으로 아버님을 바라보면서 결심했습니다. “아버지처럼 농사꾼이 되기 싫습니다. 서울 가서 기술을 배워, 기술자가 될 겁니다”라고 소리치면서 중학교를 졸업하자마자 서울로 도망치듯 올라가는 큰아들의 뒷모습을 아버님은 안타깝게 바라보셨습니다. 자동차 공장에서 일할 때도 늘 “기술을 배워도 제대로 배워야 하느니라. 남에게 뒤지지 말고 열심히 하거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래서 열심
최근 프로젝트를 함께 진행하는 지자체 담당자와 이야기를 나누던 중, 머리에 하얗게 새치가 있는 것을 발견했다. 젊고 예쁜 여성분이었는데, 대화를 나누면 놀라울 정도로 답답했다. 주변에서 기분이 태도가 되는 사람들 중 최강자를 꼽으라면 꼽을 수 있을 정도였다. 최근에 만난 사람들 중 그렇게 생각이 막혀있는 사람도 보기 어려웠다. 놀랍게도 카카오톡 알림글에는 '기분이 태도가 되지 않게'라고 되어 있었다. 나는 새치, 그러니까 흰머리카락이 잘 생기지 않는다. 아내가 간혹 가다 한 두 가닥씩 뽑아줄 정도다. 언젠가 아내가 "내일 모래면 마흔인데, 새치가 없네. 신기해."하고 이야기한 적도 있다. 이유는 간단하다. 사소한 일에 걱정하지 않고 생각이 단순하기 때문이다. 10대와 20대 때는 멀리서 봐도 제법 듬성듬성 보일 정도로 새치가 있었다. 그때만 해도 꽤 생각이 복잡했다. 돌이켜 생각해보면 심각한 우울증이 아니었을까 싶을 정도다. 생각을 처리하는 방법을 몰라서 새치가 꽤 생겼다. 그때에 비하면 지금은 놀라우리만치 검은 머리 투성이다. 우울증 진단도 받아봤는데 0점이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5~10점인 것에 비하면 상당히 드문 결과였다. 기분이 태도가 되면 안 된다
운동을 처음 시작하는 초심자는 이것저것 들쑤셔보기 마련이다. 벤치프레스도 하고, 스쾃도 하고, 덤벨도 들어본다. 평소에 먹지 않던 닭가슴살을 삶아서 먹고, 다이어트 식단도 꾸려본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다시 맥주와 안주라는 '초심'으로 돌아간다. 어떤 분야에 있던지 모든 성공자들이 Back to basic을 강조하는 이유다. 시도 자체가 나쁜 건 아니지만, 성공한 사람들은 모두 명확한 목표의식을 가지고 목표를 위해 노력했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지금은 퍼스널 트레이너가 누구나 알 만한 직업으로 자리 잡았지만, 불과 20여 년 전만 해도 퍼스널 트레이너가 그리 대중적인 직업은 아니었다. 생소한 직업이었고, 체계적인 헬스 시스템이 자리 잡고 있던 시기도 아니었다. 그런 시기임에도 슬럼프를 이겨내며 꾸준히 30여 년 간 운동을 지속해온, 명실상부 대한민국 최고의 보디빌더이자 No.1 트레이너로 불리는 선수가 있는데, 강경원 선수다. 그는 훌륭한 몸을 갖고 싶어 하는 사람들에게 3가지를 당부한다. 1. 기본으로 돌아가라 2. 식단을 유지하라 3. 분명한 목표를 정하라 30여 년 간 운동을 해오면서 기본에 충실했다고 이야기하는 그의 언어는 상당한 영
서울에서 고속버스 예약을 했는데, 광양과 동광양이 다르니, 광양가서 환불하고 다시 표를 사라고 합니다. "같은 금호고속 버스 회사인데~??" 환불하면서 표를 바꾸니까, 30% 추가금액이 발생한다고 합니다. "30%씩이나? 완전 사기꾼들." 급히 택시 타고 가면서 생각을 합니다. "이게 뭔 짓?" 책을 써 보지도 않은 사람이 책을 평가합니다. 소설을 써 본 적도 없고, 시를 쓴 적도 없는 사람이 "문학 평론가"라고 떠듭니다. 한글 문법도 모르고, 어휘 수준도 형편없는 사람이 신문사 "논설위원"이라고 사설을 씁니다. "문학인" 모임안내문에 한글도 틀렸습니다. "현제 진행중?" 그게 문학인 수준인 듯. "웃겨쓰" 공부도 못하고, 무식한 사람을, 직위가 높다고 "명예박사 학위"를 줍니다. 자격증도 돈 주고 삽니다. 웃기는 세상입니다. 정치도 모르는 애들이 당 대표이거나 최고위원이라고 떠들고 다니고, 그런 걸 뽑아 놓고 떠들썩 합니다. 영어도 못하는 선생이 영어를 가르칩니다. 정말 웃깁니다. 그런 걸 "인물"이라고 내세우는 것들이 더 웃깁니다. 그래서 세상은 재미가 있습니다. 완전 "개콘"입니다.
강사가 될 거라고는 상상한 적도 없지만, 공고를 나와 자동차 공장에서 일을 하다가 공대를 가고, 컴퓨터를 전공한 사람이 인사과장직을 맡아 실무를 처리하는 과정에서 배우고 느낀 점이 참 많았다. 어쩔 수 없이 대학원에서 경영학을 공부하고, 임원실에 들어 가 떼를 쓰듯이 얻어 낸 뉴욕 보험대학(The College of Insurance) 연수는 횡재를 한 느낌이었다. IMF지원을 받던 외환 위기에는 구조조정을 두 번씩 하면서 직원을 줄이고 사직서를 제출한 후, 강사가 될 거라고는 예상한 적도 없다. 시골에 가서 농사를 지을까, 닭을 기를까, 커피숍을 낼까, 빵집을 할까 2년이 되도록 망설이고 흔들렸다. 우연히 강의를 하게 된 때에 무모하게 도전한 것이 번역과 저술, 그리고 칼럼을 쓰는 거였다. 강의를 잘 하시는 선배들과 좋은 관계를 만들며 간접 경험을 얻고, 그 분들의 조언을 깊이 있게 들으며, 그런 과정에서 한국강사협회를 창립하고 세미나를 개최하고 강사육성과정을 진행하는 과정에서 서로서로 강의하는 법을 가르치고 배웠다. 함께 강의연습을 하고 개인 코칭을 받으면서, 어느 분이 번역한 책의 문장을 다듬어 주다가 과감하게 영어 공부를 다시 시작했다. 뉴욕타임즈나
아침 출근길에 아들이 "아빠, 가지 마" 하고 떼를 쓰며 울었다. 간신이 떼어놓고 가려는데, 이제는 "아빠, 가"하고 떠다 민다. 눈물을 펑펑 흘리며 떠미는 아들을 두고 문으로 향하는데 이번에는 잽싸게 뛰어와서 바짓가랑이를 잡고 더 크게 울었다. 그런 아들을 품에 안고 한참을 다독이다가 귓가에 대고 이야기했다. "아빠는 세상을 다스리러 가는 거야. 아빠가 세상과 싸우지 않으면, 아빠도 세상에 있는 수많은 바보들처럼 평범한 사람으로 살게 될 거야. 아빠가 바보처럼 사는 것보다, 세상을 다스리는 사람이 되는 게 좋겠지?" 그리고 사무실에 왔는데, 동료의 지인이 죽었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분은 남편과 저녁밥을 먹던 중이었다. 이런저런 담소를 나누며 밥을 먹다가 갑자기 스르르 뒤로 넘어갔고, 그대로 세상을 떠났다고 했다. 54세. 한창 일해야 할 나이였다. "하고 싶은 것 다 하고 사세요." 장례식에 다녀온 동료가 내게 이야기한 말이다. 그리고 혼잣말로 중얼거리듯 "참 허무하다."하고 이야기했다. 아프리카에서 귀국한 지 얼마 지나지 않은 어느 날, 아버지가 쓰러지셨다. 2009년 1월이었다. 평소 건강관리를 위해 수영을 다니시던 분이었는데, 수영을 하고 나와서 샤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