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회의 신 카이로스는 유명하다. 한 손에는 칼을, 한 손에는 저울을 들고 있다. 앞머리는 길지만 뒷머리는 대머리다. 어깨와 등, 뒤꿈치에는 날개가 달려 있다. 기회를 잡기 위해서는 저울과 같은 정확한 판단, 칼과 같은 결단력이 필요하며, 또한 대머리이기 때문에 지나가면 잡을 수 없다는 의미로 기회를 이야기하고 있다. 은유적인 표현이지만, 사실 기회의 신은 발견하기만 하면 잡을 수 있다. 앞머리를 잡든, 날개를 잡든, 뒤통수를 냅다 갈기고 쓰러뜨린 뒤 온몸으로 잡든, 일단 잡으면 그만이다. 중요한 건 잡아야 한다는 사실이다. 누구나 바쁘게 살아간다. 성과를 내는 하루가 있는 반면, 그저 시간만 때우다가 하루가 훌쩍 가는 경우도 있다. 생산적인 삶의 가치가 무척 크다고 느껴지는 어느 시점이 되면, 비로소 시간관리의 필요성을 느낀다. 그렇게 시간관리를 하다 보면 비어 있는 시간이 꽤 많다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그때 비로소 기회의 신이 모습을 드러낸다. 나는 소설을 즐기지 않는 편이다. 허구의 세계에 불과한 소설이 뭐 그리 대단한 가치가 있겠는가 하는 생각에서였다. 주로 읽는 책이 경제, 경영 서적이었고, 그 외 철학적 가치관에 기반을 둔 심리학 서적과 교육 서적
지금은 내 손 안의 스마트폰으로 신문, 잡지에 있는 최신 정보를 누구나 쉽게 접할 수 있는 시대죠. 세상이? 시대가 많이 달라졌어요. 예전에 저한테 누가 그랬어요. “책 많이 읽는다고, 신문 자주 본다고 누가 밥 먹여주냐?” 그랬는데, 저는 책을 만들고 글을 쓰는 직업으로 30년 이상을 살았어요. 책을 읽고 글을 써서 밥 먹고 살아온 거죠. 한마디로 그런 내 인생을 “글밥인생”이라고 표현해요. 그동안 카피라이터로, 기자로 글을 써왔고 최근 12년 정도는 책 만드는 작가 겸 출판인으로 일하고 있어요. 내 책도 썼지만, 다른 사람 책을 써주는 대필도 많이 했어요. 대필은 책은 내고 싶은데 글쓰기가 서툰 분들의 자서전을 대신 써주는 것이에요. 그때나 지금이나 같은 글을 쓰고 있지만, 점점 글을 쓰기가 좋아져요. 기기의 도움을 받고 있으니까요. 컴퓨터로 글을 타자하면 펜으로 쓸 때와 다른 장점도 있고, 또 인터뷰할 때 녹음한 걸 텍스트로 만들어야 하는데 지금은 기계가 다 해주죠. 녹음파일을 자동으로 텍스트로 변환해 주거든요. 텍스트로 변환하는 데 10초도 안 걸려요. 변환된 텍스트를 내가 읽어보고 핵심을 추리고 재구성해서 글을 쓰지요. 그만큼 어떤 글이라도 내가 나
20대 시절부터 늘 쓰는 습관이 있었다. 서른을 갓 넘기면서부터는 한동안 손바닥만 한 작은 수첩을 늘고 다녔다. 서른 중반이 넘어가는 어느 시점부터는 플래너 바인더를 항상 옆구리에 끼고 다니기 시작했고, 많은 메모가 필요할 때는 메모장을 다운로드하여서 사용하고 있다. 에버노트에서 원노트로, 원노트에서 노션으로 옮겨갔는데, 노션에서는 더 이상 더 나은 메모장으로 넘어갈 필요성을 느끼지 못하게 되어 꾸준히 몇 년째 사용하고 있고, 아이패드 전용앱인 프리폼과 공유하면서 일상을 기록한다. 일상이라는 것은 결국 단순한 시간과 평범함의 반복이다. 특별할 것도 없고 대단할 것도 없다. 그렇기에 일상의 기록이라는 것도 기실 알고 보면 별 것 아니다. 가구佳句 실력을 뽐내기 위한 것도 아니고, 소설 작품을 쓰기 위한 밑거름이 되어주는 것도 아니다. 그저 늘 똑같은 하루의 순환,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굳이 평가하자면 고백문학이라고나 할까. 둔사를 쓸 필요도 없는 게 일상의 기록이다. 그런 일상의 기록이, 어느 시점이 되어서는 그리움과 소중함으로 다가올 때가 있다. 더 이상 뒤로 물러설 곳이 없다고 느껴지는 어느 날, 고되고 지친 하루를 보내고 난 후에 우연히 열어본 메모
초등학교 학생이 선생님의 뺨을 때리고, 학생들이 보는 앞에서 학부모가 선생님의 멱살을 잡으며 삿대질을 하고, 어린 학생과 교사들이 스스로 목숨을 끊는 일이 발생하는 한국의 교육 현실은 더 이상 외면할 수 없었다. 대학생이 한자를 모르고, 외국인에게 길도 안내해 주지 못하는 학생이 많다. 인공지능 시대에 발맞추어, 쉽고 재미있는 교육을 지향하면서 문해력(文解力)이 낮아지고, 인문학은 사라지고 있다. 이를 해결하고 새로운 미래를 책임져야 할 교육당국 즉, 교육부와 교육위원회, 국가교육회의 등은 뒷짐지고 구경만 하는 듯 하다. 이에, 지난 토요일(6월 8일), 유치원 원장에서부터 교장을 역임하신 분, 전*현직 교수들 20여 분을 모시고, 7시간 넘게 난상 토론과 질의 응답을 통해 한심한 교육현장의 문제점을 지적하고, 대책과 대안을 논의했다. 본 글을 통해 그날 토론회의 “모든 내용”을 밝힐 수는 없으나, 주요 요지는 다음과 같다. 첫째 한국의 교육은 유치원에서부터 대학까지 전반적으로 무너지고 있으며, 최악의 상황으로 치닫고 있는데, 선생님과 교수는 물론, 교육관련 부처도 모두 알고 있으나 외면하고 있다는 거다. 이런 사안을 건드리고 문제점을 제기하면 자칫 징계를
슬픈 추억 덕분이다. 잘 나가던 글로벌 기업이 IMF 외환위기를 맞이하여 정리해고, 좋게 말해서 “구조조정 또는 명예로운 퇴직(명예퇴직)”이었다. 전국적으로 유행이 되다시피 한 구조조정, 그 때는 그런 줄 알았고, 그게 정답인 줄 알았지만, 지나고 보니 정부의 실책(失策)을 모면하려는 술책이었다. 이어진 “이직(離職)과 전직(轉職)”은 오래가지 못했다. 15년 이상 다니던 회사를 한 번 그만두고 나니, 습관이 된 것이다. 2~3년에 한 번씩, 서너 군데 다니다가 그만두고 결심했다. “다시는 직장생활 하지 말자.” 좀 쉬고 싶었다. 미국으로 날아가서 가장 화려한 도시, 라스베가스에서 방황을 했다. 죽음의 계곡(Death Valley)과 콜로라도 강의 후버댐을 오르내리며, “뭘 해먹고 살까?” 고민을 하던 중, 멋진 책을 한 권 샀다. 나폴레옹 힐이 80여 년 전에 쓴 “성공의 법칙(The Law of Success)”를 두어 번 읽고, 그 책에 쓰여진 대로 살고 싶었다. 한국으로 돌아 오자마마자 그 책을 요약하고 강의 준비를 했다. 강사가 되기로 결심을 하고 우선 책을 쓰기 시작했다. 번역에도 뛰어들었다. 유창하거나 능숙한 영어실력은 아니었지만, 먹고 살기 위
“부자들, 눈뜨면 신문부터 펼쳐, 슈퍼리치 독서량 일반인 3배 (매일경제신문. 2024. 4. 25.)”, “부자들의 아침 일과, 종이신문 읽기, 워런 버핏 버크셔해서웨이 회장, 90세가 넘은 나이에도 하루에 5, 6개의 신문을 샅샅이 훑으며, 청소년들에게는 “세상을 알려면 신문부터 읽어라”고 조언하곤 했다. (동아일보, 2024-04-27)” 위 2개의 기사를 읽으면서 떠오르는 사람이 있다. 신입사원 면접을 보면서 입사지원자들에게 질문을 했는데, 한 여대생이 거의 모든 질문에 대해 한 번도 막힘 없이, 답변을 잘 했다. 특별한 습관이 있는지 물었더니, 그 학생은 날마다 종이신문 두 개를 밑줄 쳐 가며 읽는다고 했다. 역시 달랐다. SNS 사회, 인공지능과 챗GPT 가 판을 치는 시대, 유투브만 보고, 카톡으로 대화하는 시대에 무슨 종이 신문을 읽느냐고 하는 무식한 사람도 있지만, 요즘도 지하철에서 신문을 읽고, 계단을 오르내리며 책을 읽는 젊은이들이 있다. 넘어질까 염려되어 옆에서 따라가기도 했다. 종이 신문을 읽거나 밑줄 쳐 가며 책을 읽는 사람의 다른 점은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우선 머리 속에 들어 있는 단어와 문장이 다르다. 입에서 나오는 어휘의 품
매우 친한 친구가 앞에 있다고 예를 들어보자. 대개 비슷한 말을 먼저 하게 될 것이다. "어제 있잖아..." "얼마전에 있었던 일인데..." "소식 들었어?" 그리고 마지막에는 나의 주장, 즉 사견私見을 이야기한다. "나는 그 이야기 듣는데, 좀 그렇더라." "그러니까 나는 이렇게 생각하거든. 뭐냐면..." 말하듯이 글쓰기도 여기에서 시작된다. 흔히 스토리텔링이라고 하는 글의 구성은 일반적인 역사서나 자기개발류의 plot과는 다르게 말하듯이 정리되곤 하는데, 짜임새 있는 구성, 즉 story가 있어서 쉽게 청중을 집중시킨다는 장점이 있다. 에세이와 자서전이 주로 스토리텔링의 plot을 따른다. 에세이나 자서전은 기록한 사람의 일상을 그 사람의 언어로 접하도록 쓰이기 마련이다. 어렵지 않은 데다, 누구에게나 흔히 일어날 법한 이야기를 그 사람만의 언어로 접하게 되니 색다르고 재밌게 읽히는 것이다. 반대인 경우도 있다. 종종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어렵게 말하는 사람들이 있다. 쉽게 설명할 수 있는 내용을 구구절절 어렵게 설명한다거나, 질문과 전혀 상관없는 대답이 나오는 식이다. 청중의 의도를 파악하는 청해력, 주제에 맞춰서 의견을 이야기하는 이해 능력
"AI에 밀려나는 어문학과들(조선일보)” “다시 쌓는 바벨탑, 무너지는 언어 장벽, 영어에 쓰는 에너지 줄여 다른 곳 투자할 때 (동아일보)” 몇몇 일간지의 칼럼을 읽으며 한심한 생각을 지울 수가 없었다. 아마도 외국어가 취업에 중요한 게 아니고, 일상생활에 긴요하지 않다는 뜻일 게다. 말이 되는 얘기를 하는 건지 모르겠다. 내로라 하는 교수와 신문이 그렇게 무식하고 몰상식해도 되는지 모르겠다. 교육은 취업의 목적이 아니며, 당장 필요해서 공부를 하는 게 아니다. 좋은 회사 취직하려고 대학을 가는 게 아니다. 인간이고 사람이기 때문에 공부를 하는 것이다. 쓸데없이 역사와 철학, 미학과 심리학, 문학과 라틴어를 왜 공부해야 하는지 정말 모른단 말인가? 독어독문학과는 독일어도 공부하고 독일 문학도 연구하며, 불문과는 프랑스어를 배우고 프랑스 문학도 공부하는 것인 줄 알고 있다. 유럽의 유수대학들은 “사용하지 않은 고대 언어, 라틴어”를 요즘도 가르치고 있다. 대학을 나온 후 또 대학원을 가는 사람들도 있다. 딱히 석사학위나 박사학위를 따려고만 가는 게 아닌 경우도 많다. 공부 자체가 좋기도 하고, 배움의 즐거움과 가치를 알기 때문이다. 필자는 공대를 나왔지만,
글을 쓰는 데 있어서 정해진 기준이 있는 것은 아니지만, 글은 일단 쉬워야 한다고 생각한다. 모든 사람이 논설문이나 사설을 대하듯이 글을 쓰거나 읽는 건 아니다. 어렵고 난해한 글이 마냥 좋은 글은 아니라는 말이다. 이처럼 쉬운 글을 쓰기 위해서 반드시 필요한 것들 중에 하나가 바로 국어사전이다. 사전은 아주 오랜 세월동안 쓰여진 단어들을 모아놓은 책이다. 모르는 단어를 찾기 위해서 사용하는 책이라기보다는, 어휘의 풍성함을 위해서 사용해야 하는 책이라고 할 수 있겠다. 글을 쓰는 사람이라면 반드시 국어사전이 필요하다. <대통령의 글쓰기>로 유명한 강원국 작가도 강의에서 국어사전의 유용함을 이야기한 바 있다. 얇고 가벼운 라틴어 사전은 있다. 얇고 가벼운 영어사전도 있다. 그러나 얇고 가벼운 국어사전은 없다. ‘얇고 가벼운 사전이면 된다’ 라는 식의 관념은 국어사전에게 통하지 않는다. 한국어의 특성상 국어사전은 20만 자 이상의 단어를 수록한 사전이어야 하며, 틈날 때마다 들춰보면서 조악한 둔필을 갈고 닦아야 한다. 일필휘지는 정답을 모르는 주관식 문제에 애국가를 쓸 때나 적합한 표현이라는 것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개인적으로 두툼한 국어사전을 펼칠
20년 가까이 강의를 하고 글을 쓰면서 가르치는 것보다 듣고 배우는 게 더 많아서 좋다. 네팔, 몽골, 인도네시아 등 여러 외국인들에게도 강의를 하면서 '서로 다른 문화를 존중하는 것(Respect for Difference)'가 얼마나 어려운지 알게 되었다. 방탄소년단, 블랙핑크, 미나리, 오징어게임, 기생충과 K-Golf, K-Food, K-Culture 등의 공통점은 무엇일까? 세계를 점령하고 세계인들과 경쟁하고 있다는 거다. 정규교육과, 즉 고등학교나 대학교를 제외한 기업의 임직원 연수 교육이나 일반인을 위한 평생교육과정에서 운영하는 교육에 있어서 '글로벌 경쟁력을 갖추기 위한 교육'은 어떠해야 할까? 첫째, 언어가 되어야 한다. 지구상의 누구와도 소통이 되어야 하는 바, '영어는 기본'이 되어야 할 것이며 한글이나 한국어도 품위 있고 수준 높은 어휘력을 갖추어야 할 것이다. 듣기 거북하고 함부로 쓸 수 없는, 저속하고 상스러운 언어가 자연스럽게 통용되는 사회가 되어서는 안 된다. 가능하다면 제2, 제3 외국어도 공부를 해 두면 좋을 듯 하다. 중국어나 스페인어도 공부하고 싶을 때가 있다. 써먹을 기회가 없는 걸 알면서 라틴어를 공부하는 즐거움을 느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