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육은 혁신과 개인적인 예외주의를 향한 열쇠다 – 멜라니아 트럼프 (Melania Trump: Education is the key to innovation and individual exceptionalism, FOX News, Sept. 8, 2022)” “후손들을 위한 복지는, 시민으로서, 우리가 그들의 학문적 노력을 어떻게 지원하는가에 달려 있다. (The well-being of the next generation depends on how we, as citizens, support their academic efforts)”고 주장하는 트럼프 전 대통령 부인, 멜라니아 트럼프 여사의 글을 읽으며 공감을 합니다. 최근 3년 동안 코로나와 우크라이나 전쟁, 기후변화 등에 의한 “완벽한 폭풍(Perfect Storm)”에 의해 교육시스템에 혼란이 생기고 있습니다. 또한 어려운 환경이 더욱 악화되고 있으며, 경영적인 측면에서도 더욱 명확한 “성과 위주의 실적 평가”가 필요해짐에 따라, 어설픈 인기 위주의 정략적 술수에 속지 않으려는 시민의식이 강해지고 있습니다. 개인이나 국가의 역사는 고통과 비극을 통해 한 단계 성숙해진다는 진리를 잊지 않고 있습니다
필자는 30년 넘게 정기적으로 구독하는 신문이 있다. 저녁에는 석간신문을 수시로 사서 읽는다. 매주 서너 번씩 서점에 가서 뉴욕타임즈와 파이낸셜타임즈를 사고, 스마트폰에서 Al Jazeera 와 BBC, CNN 등을 자주 살펴 읽는다. 좋은 칼럼이나 기사는 신문 값보다 100배 이상의 가치가 있음을 느낀다. 글로벌 뉴스와 칼럼을 읽으며 세상의 흐름을 따라가고자 한다. 모든 신문을 인터넷으로 대충 볼 수도 있다고 잔소리하면서, “그까짓 신문을 뭣 하러 읽느냐?”고 핀잔을 주는 친구도 있지만, 종이 신문을 살피다 보면 밑줄을 치면서 읽을 만한 칼럼도 있고, 리더들이 귀담아 들어야 할 조언과 충고의 글도 날마다 실린다. 대기업 임원실에는 다양한 종류의 신문들이 매일 쌓이고, 아침 일찍 출근해서 교양서적과 더불어 여러 신문을 상세히 읽는 임원들이 대부분이다. 그래서 기업이 정치나 언론보다 앞서간다. 제주 국제공항과 김포공항에서 신문을 사려고 하니 가판대가 보이질 않는다. 화려하고 웅장하게 단장을 한 경부고속터미널에도 먹고 마실 건 가득하지만, 신문은 파는 곳이 없다. 호남고속터미널에는 신문가판대가 있는데, “그 신문은 없습니다”라며 퉁명스럽게 대답을 한다. 국내 여
“가난하게 살아도 죄는 짓지 말아라.”, “14살인 내가 어른이 된 나에게 응원을 해 주고 싶다.”, “2051년에도 난 아름다울 수 있어” 소년원에 있는 학생이 30년 후의 자녀에게 쓴 편지 몇 줄을 읽으며 가슴이 뭉클했습니다. 30년 후의 자녀들에게 쓴 “어린 학생들의 편지”를 읽으며 감동이 넘쳤습니다. 편지는 “이미 알고 있는 누군가에게 쓰는 글”인 줄 알았는데, 자신에게, 그것도 자신의 미래에 대해, 자신의 미래의 자녀들에게 편지를 쓴다는 것은 상상력의 한계를 깰 수 있는 동기를 부여할 것이며, 글과 책이, 글쓰기와 독서가 얼마나 큰 영향력이 있는지 느끼는 계기가 되었을 겁니다. 그 어린이들의 30년 후를 보고 싶습니다. “아름다운편지운동본부 곽 대표님은 어떻게 15년 전에 이런 생각을 하셨을까?” “우리 나라 모든 학생과 아이들이 30년 후의 자녀들에게 편지를 쓴다면 얼마나 좋을까? 아니, 부모들은 이런 편지를 읽고 싶지 않을까?” 15년 동안 전국의 초중고 학생들에게 30년 후의 부모가 되었을 때, 그들의 자녀에게 전해주고 싶은 마음으로 쓰는 편지는 정말 아름답기 그지 없습니다. 어느 학교는 선생님들께서 편지 쓰는 학생들을 격려해 주시는 편지를 써
코로나바이러스로 인해 많은 사람들이 고통을 받고 우울해 하는 때, 마침 미국 CNN에 오벌린대학 낸시 교수의 칼럼이 실렸습니다. (“Five steps to landing the job of your Dreams”, Nancy Darling / Professor of psychology at Oberlin College CNN, July 16, 2020) 그 글의 요지를 필자의 경험과 비교하여 정리해 봅니다. 은퇴(예정)자 또는 전직(轉職)을 하고자 하는 분들에게 참고가 되리라 믿습니다. 제 1 단계: 보이지 않는 자신의 강점을 찾는다. (Finding your invisible strengths) 사람은 누구나 장점과 약점이 있습니다. 장점을 키우면 강점이 됩니다. 중요한 역량 (Core Competency)을 크게 구분하면, 활용하고 써먹을 수 있는 기술(Technical Skills), 고객 또는 임직원들과의 의사소통능력 (Communication), 언어 구사 능력(Language, 의사소통 능력과 다름), 정량적인 역량(Quantitative Skills, 데이터와 숫자를 다루는 능력), 문제 해결능력과 논리력(Problem Solving
“안전 하자. I Seoul U. 개딸과 양아치. 윤핵관” 이게 단어인가 글인가? 제대로 된 말인가? 이해할 만한 문장인가? 재미도 없고 뜻도 알 수 없는 “귀신의 글”이다. 유명한 교수나 정치인들이 쓴 글을 읽다가 문법이 틀리 거나 오류가 있는 문장을 발견하면 기분이 나쁘다. 공부 좀 하고, 많이 배웠다는 사람들이 어떻게, “글을 이렇게 성의 없이 쓰는가?” 생각하다가 다시 한 번 읽으면서, “몰라서 틀렸다.”는 걸 알게 된다. 한자는커녕 한글도 모르는 교수와 논설위원들이 너무 많다. 학생 탓을 할 것도 못 된다. 교육 현장의 붕괴가 일어나고 있다. 실망 하지 않을 수 없고 염려하지 않을 수 없다. 최근에 젊은이들이 문해력(文解力)이 약하다고 걱정을 하는 어른들이 있다. 젊은이들만 그런 게 아니다. 현대인들이 SNS으로 대화를 하고, 쓰레기 방송을 자주 접하면서 개그와 유머를 섞은 말과 글을 보다 보니 자신도 모르게, 올바른 문법은 고사하고 한글도 제대로 쓰지 못하는 걸 자주 본다. 그들끼리 장난하듯이 떠들고 적당히 즐기려고 하는 건 이해가 된다. 하지만, 신문이나 책에 실리는 글들 중에 잘못된 한글을 쓰거나 문법에 맞지 않는 문장을 보면 한심한 생각이 든
서울에서 고속버스 예약을 했는데, 광양과 동광양이 다르니, 광양가서 환불하고 다시 표를 사라고 합니다. "같은 금호고속 버스 회사인데~??" 환불하면서 표를 바꾸니까, 30% 추가금액이 발생한다고 합니다. "30%씩이나? 완전 사기꾼들." 급히 택시 타고 가면서 생각을 합니다. "이게 뭔 짓?" 책을 써 보지도 않은 사람이 책을 평가합니다. 소설을 써 본 적도 없고, 시를 쓴 적도 없는 사람이 "문학 평론가"라고 떠듭니다. 한글 문법도 모르고, 어휘 수준도 형편없는 사람이 신문사 "논설위원"이라고 사설을 씁니다. "문학인" 모임안내문에 한글도 틀렸습니다. "현제 진행중?" 그게 문학인 수준인 듯. "웃겨쓰" 공부도 못하고, 무식한 사람을, 직위가 높다고 "명예박사 학위"를 줍니다. 자격증도 돈 주고 삽니다. 웃기는 세상입니다. 정치도 모르는 애들이 당 대표이거나 최고위원이라고 떠들고 다니고, 그런 걸 뽑아 놓고 떠들썩 합니다. 영어도 못하는 선생이 영어를 가르칩니다. 정말 웃깁니다. 그런 걸 "인물"이라고 내세우는 것들이 더 웃깁니다. 그래서 세상은 재미가 있습니다. 완전 "개콘"입니다.
강사가 될 거라고는 상상한 적도 없지만, 공고를 나와 자동차 공장에서 일을 하다가 공대를 가고, 컴퓨터를 전공한 사람이 인사과장직을 맡아 실무를 처리하는 과정에서 배우고 느낀 점이 참 많았다. 어쩔 수 없이 대학원에서 경영학을 공부하고, 임원실에 들어 가 떼를 쓰듯이 얻어 낸 뉴욕 보험대학(The College of Insurance) 연수는 횡재를 한 느낌이었다. IMF지원을 받던 외환 위기에는 구조조정을 두 번씩 하면서 직원을 줄이고 사직서를 제출한 후, 강사가 될 거라고는 예상한 적도 없다. 시골에 가서 농사를 지을까, 닭을 기를까, 커피숍을 낼까, 빵집을 할까 2년이 되도록 망설이고 흔들렸다. 우연히 강의를 하게 된 때에 무모하게 도전한 것이 번역과 저술, 그리고 칼럼을 쓰는 거였다. 강의를 잘 하시는 선배들과 좋은 관계를 만들며 간접 경험을 얻고, 그 분들의 조언을 깊이 있게 들으며, 그런 과정에서 한국강사협회를 창립하고 세미나를 개최하고 강사육성과정을 진행하는 과정에서 서로서로 강의하는 법을 가르치고 배웠다. 함께 강의연습을 하고 개인 코칭을 받으면서, 어느 분이 번역한 책의 문장을 다듬어 주다가 과감하게 영어 공부를 다시 시작했다. 뉴욕타임즈나
“모르시는 말씀 하지 마세요. 수업 중에 학생을 건드리면 큰 일이 납니다. 학교 교장에게 고발하면 다행이지요. 곧바로 교육청에 신고합니다. 여기에 말단 선생님은 모든 힘을 잃게 됩니다. 수포자가 14%라고 보도되는 건 거짓말입니다. 적어도 40%정도는 수학을 포기했을 겁니다.” “학생의 자유를 빌미로 공교육이 무너지는 마당에, 어떤 교사들은 역사를 왜곡하고 북한을 찬양하며, 친일 반일을 부추기면서 갈등을 일으킵니다. 학생들이 그것을 모르는 줄 아세요? 무엇이 옳고 그른지 학생들은 이미 선생님들 이야기와 주장을 다들 파악하고 있습니다. 그냥 조용히 있을 뿐입니다. 수업시간이 끝나기를 기다리면서.” 교직에서 물러나신 선생님과 말씀을 나누며 갑자기 화가 났습니다. 이렇게 운영되는 학교 교육에 대해 교육당국은 아무 대책도 없고 생각도 없는지 묻고 싶습니다. 선생님의 교권(敎權)과 학생의 인권(人權)을 비교하자는 게 아니라, 교육자로서의 사명과 책임이 있으며, 학생의 자세와 의무가 다르다는 겁니다. 필자가 공고를 다닐 때, 영어 선생님은 얼마나 강의를 잘 하고, 학생들에게 강한 의욕을 불어 넣어 주셨는지 모릅니다. 지금도 그 분 덕택에 영어를 열심히 공부하면서, 일상
일과 삶의 균형을 의미하는 '워라벨(Work and Life Balance)' 못지않게 '일과 공부의 균형(Balance with Work and Learning)'이 의미하는 바를 되새길 필요가 있습니다. 6월 11일자 파이낸셜 타임즈 사설에 “일하며 배우고, 공부하며 익히는 것(Learning by doing and Doing by learning)만큼 강한 학습은 없다”는 기사가 실렸습니다. 일은 못해도 공부를 좋아하며 책만 읽는 선비가 있고, 무식한 듯 하면서도 일은 잘하고 돈을 잘 버는 사업가가 있습니다. 그런 사람들 중에는 가정이 엉망진창인 집도 있지만, 적당히 어렵게 살면서도 화목한 집안도 있습니다. 가장 바람직한 것은 공부 좋아하는 사람이 학자나 선생님이 되거나, 사업 잘 하는 경영자가 대학원 최고경영자(CEO)과정을 다니면서 공부하는 경우라면 매우 좋겠습니다. “설마 그런 사람이 있겠어?”라고 따지는 사람은 세상물정을 잘 모르는 사람입니다. 필자는 공부를 좋아하면서도 형편에 따라 사느라 이른 나이에 공장을 다니며 20여 년간 직장에서 열심히 일만 했는데, 우연히 강의를 하고 책을 쓰게 되어 후반기 삶에서 '딱 맞는 일거리'를 찾았습니다. 그런
코로나 감염 양성이 나와서 불안해졌다. 뒷목이 뻣뻣해지면서 목이 쉬는 듯하여 격리 신청을 했다. 구급차가 싣고 가서 내려 준 곳은 영등포의 한 요양병원이었다. 이동하지 말라며 데려간 입원실은, 오랫동안 병실에서 기저질환으로 고생하시는 어른 환자분들 5명이 누워계셨다. 안내해 준 침대에 누우면서 걱정을 했다. 여기 계신 노인들은 모두 기저질환이 심한 중증환자들인데, 감염이 되면 어쩌나 하는 우려가 앞섰으나 같은 환자로서 필자는 힘이 없었다. 혹시나 옮겨 줄까 하면서 기다린 일주일은 금방 지나갔다. 질병과 사투를 벌이며 노인들과 코로나 환자를 돌보는 요양보호사들이 안쓰러웠다. 퇴원은 각자 하라는 말을 듣고, 의사소견서만 받아 들고 나와서 전철을 타려다가 민폐를 끼치는 것 같아 택시를 탔다. 최근 확진자가 많이 나오는 요양병원의 문제가 무엇인지 알 듯했다. 코로나 3년째 접어들면서 전 세계 감염자는 4억 2천 600만 명에 이르고, 사망자는 589만 명을 넘겼다. (TIME, 2022. 2. 23) 미국은 감염자 7천 852만 명, 사망자 93만 명, 영국 감염사망자 15만 명, 러시아의 사망자는 20만 명에 이른다. 비극적인 상황이지만, 한국은 감염자 233만